정치 투명성 높인 조선왕조 기록문화 전통 나라경제 KDI 경제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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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으로는 국왕 아래에서 의정부가 문반을, 중추부가 무반을 총괄하여 지휘하는 위치에 있으나, 실제는 의정부가 문무백관을 모두 지휘하였다. 조선의 제26대 국왕인 고종 이희(李㷩)는 재위 34년이 된 해인 1897년 10월 ‘대한국’을 새 국호로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2년 뒤에 반포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1조는 “대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되온 바 자주독립하온 제국(帝國)이니라.”라고 하여, 정식 국호가 ‘대한국’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한국’보다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을 더 즐겨 사용하였다.


형태는 원본을 4분의 1로 축쇄(縮刷)하여 한장본(漢裝本) 888책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때 출판한 것이 30부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가고 국내에는 8부 밖에 두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납속(納粟)으로 관직을 팔아 국정이 문란해지고, 인구는 줄었으며, 토지는 황폐해져 경작 면적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호적과 토지의 대장이 소실되어 역을 부과하고 조세를 징수하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또한, 문화재 손실도 커서 왕궁을 비롯, 유서깊은 시설들과 사고(史庫)의 실록 등 많은 문헌들도 소실되었다. 러일전쟁 후인 1904년에 영국인 베델(裵說, Bethell, E.)과 양기탁(梁起鐸)이 『 대한매일신보』를, 1906년 오세창(吳世昌)이 『 만세보』를 발간하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700리를 더 가면 공험진이 나오고 동북쪽으로 700리를 가면 선춘령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곳에 경원도호부를 놓고 보면 위 기록 해석에 전혀 문제가 없다. 우선 경원도호부의 치소에서 바다까지 동쪽으로 20리라고 했는데 함경북도 경원군은 내륙에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 바다를 보러 가려면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가야 하니 20리로는 턱도 없다. 또 서쪽으로 경성군 두롱이현까지 40리 거리라고 하는데 이 역시도 이상하다. 물론 조선시대 당시 경성군은 지금의 청진시와 어랑군까지 아우르는 넓은 군이었고 경성읍성도 현재는 청진시에 속해 있다. 즉, 공험진은 경원도호부에 속해 있었는데 경원도호부의 치소에서 북쪽으로 700리 지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 선택한 것은 관이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각염법(榷鹽法)이라 부르는 일종의 소금 전매제였다. 관이 염장 설치와 생산을 관할하고 내륙 고을에는 염창(鹽倉)을 설치하여 유통까지 관할하였다. 태조 때에는 쌀과 포(布), 태종 때에는 잡곡도 소금과 교환할 수 있게 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개인이 소금을 굽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상인의 소금 유통 판매를 엄격하게 배제한 결과, 소금을 얻기 어려운 곳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영토의 3면이 바다이고 섬도 많은 까닭에 어업이 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시대의 어업은 면화 재배의 확산에 따라 면망을 만들어 쓰게 되고, 제주도 어민과 해녀가 활동하면서 전보다 먼바다에도 나가 활동하고 물질을 하는 지역도 넓어지는 등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광무개혁은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자본주의적 산업 기반과 근대적 국가체제를 갖추고자 하였음에도 한계가 뚜렷하였다. 황실재정의 가장 큰 몫이 군사력 증강에 투입되었는데, 국방을 위해 설치한 진위대보다 황제의 친위대와 시위대를 위한 몫이 더 컸다. 그 결과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제국의 군대는 별 구실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실권자였던 조병식 등은 민권 신장과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며 외국에의 이권 양도를 반대하는 독립협회를 탄압하고, 경제권을 장악하여 근대적 회사와 기업, 은행 등을 설립하여 경영하며 사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대한제국은 1897년에 조선 국왕을 황제로 격상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채택하며 국호를 바꿈으로써 성립되었다.


확대된 정치세력은 새로운 차원의 정치적 전망과 실천이 요구받기 시작한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으로 나뉘었고, 결국은 식민지로 전락하는 거대한 파국을 맞고 말았다. 고려말에 들어와 활동한 사람과 그 후손 중에는 조선의 문화 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요동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 사람의 후예들이 조선 건국 후 대거 입국하였는데, 그 가운데 명(明)의 군호(軍戶)로 편성되어 있던 사람들은 명의 요구에 따라 그 가족과 함께 돌아가야만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포로로 잡혀서, 19세기에는 농사지을 땅을 찾아 국외로 상당한 인구가 유출되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려 후기에 원(元)의 지배 아래 놓였고 반란도 일어난 일이 있는 제주도는 조선 건국 후 빠른 속도로 확실한 영토로 안정을 찾아갔다. 고려 말엽 왜구의 침입 때문에 주민이 이주하여 다른 고을에 통합되거나 수령이 향리 등을 거느리고 큰 고을로 가서 더부살이하던 바닷가나 큰 섬 지역에도 차츰 주민들이 돌아옴으로써 다시 고을을 두게 되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었고,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공물의 부담은 전세나 역보다도 무거웠고, 또 부과나 징수 과정에서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그것은 일단 배정되면 감면이 어려웠고, 당초에 배정된 토산물이 뒷날에는 생산되지 않은 것도 있었으며, 애초부터 실지로는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배정되는 경우조차 있었다. 숙종 때 이르러 양역의 폐단이 논의되어 양역이정청(良役釐整廳)이 설치되고, 양역사정절목(良役査正節目)이 제정되기도 하였으나 확고한 대책은 없었다. 그후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어 종래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여 받도록 결정하였다. 봉족제는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주140으로 개편되었다.


특히 1558년(명종 13) 영천군수 안상(安瑺)은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건립할 때 이황에게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이황의 문하에서 황준량과 박승임 등이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각각 풍기와 영천을 대표하는 학자로 이후 영주 성리학의 중흥을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다급해진 휘빈 김씨는 세자가 자신에게 빠져들게 할 갖가지 방술을 익히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문종의 수발을 드는 궁녀들의 신발을 훔쳐내 그것들을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세자가 마시는 술에 그 재를 몰래 넣어 마시게 하면 문종이 본인만 찾게 된다는 비방이었다. 결국 신발이 자꾸 사라진 궁녀들이 자체 조사에 나선 결과 이러한 사실이 드러났고 망신을 당하게 된 세종은 재빨리 세자빈을 폐출하고 새로운 세자빈을 뽑았다.


한편, 조선에는 지역민들을 치료하고 약재를 처방한 유의(유학자이면서 의학 지식에 밝은 사람)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석간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영주에서 지역민을 치료하는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정조는 재난 상황에서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펼쳤고, 이와 더불어 정약용은 근본적으로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역병을 예방하기 위해 의서 제작, 한글 번역, 약재 제공 등의 방안을 제시했고, 재난 대책과 예방 대책 연구를 지원했습니다. 『간이벽온방언해』 뒤에 숨어 있는 이러한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의 인구와 관련된 조사는 주로 공물(貢物)을 걷고 요역(徭役)과 군역(軍役)을 부과할 목적으로 호(戶)와 구(口)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이를 위해 작성한 문서인 호적과 군적, 호적대장 등이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고, 특정 연도의 총호구(戶口) 수가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전하기도 한다. 현재 북한의 자력갱생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부 동원 가능 자원을 최대한 끌어 모으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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